CEO의 일기 #3: 20대 초반의 실패 그리고 스타트업과 나의 인연

*해당 포스팅은 팀리더인 우진님의 개인 SNS에 올라온 회고를 발췌한 내용으로, 글의 특성상 높임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공부하러 떠난 프랑스에서 어쩌다가 시작한 비즈니스

딱 9년 전 이 무렵,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작은 사업체의 경영을 맡게 되면서, 영화를 공부하겠다고 프랑스에 갔던 나의 인생은 누군가로 인해, 어떤 일로 인해 송두리째 바뀌게 되었다.

1년 간 프랑스의 지방 도시에서 불어를 배우고 영화학교 입학 준비를 위해 파리로 올라간 2012년 초,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직원 5-6명 규모의 파리의 작은 부동산 협회였다. 프랑스의 국영 철도청 SNCF와 우체국 La Poste 등의 직원 기숙사 공실을 계약하여 어학원과 연계해 국제 유학생들에게 재임대하고, 학생 보험과 인턴십을 연계하는 오프라인 유학생 플랫폼이었다.

처음에는 학교 입학 전 프랑스어를 더 연마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 이 사업을 창업하고 7년 간 이끌어 오던 일본인 사토씨는 나의 인생을 어찌보면 바꿔놓은 은인이다. 당시 고등학교 졸업장만 갖춘, 20대 초반의 나에게 그는 모든 자유를 주었었다.

회계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렇게 하면 더 편하게 돈을 관리할 수 있지 않나요, 제가 이거 더 개선해봐도 되나요?” 라며 말하는 내게 무엇이든 한번 해보라며 모든 정보를 주었고, 프라이싱 전략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일괄적인 가격보다는 그때그때의 수요/공급에 따라 조금 더 변동적으로 가격을 매기면 우리 공실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라는 내게 그럼 너가 한번 가격 정책을 바꿔보라며 용기를 복돋아 주셨다.

순수하게 느낀 비즈니스의 재미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세상에서 유의미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구나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혼자 경영학 책을 사서 뒤지기 시작하였고, 배운걸 현실에서 반영하여 작더라도 실존하는 임팩트를 만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즐겁다보니 미친듯이 하게 되었고, 다행히 결과도 따라주어 첫 6개월 동안 매출도 정말 많이 오르게 되었다. 100유로인가에서 인턴급여로 시작했던 월급도 사토상이 매달 올려주셨는데, 돈이 아니라 나를 믿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그렇게 6개월이 흐르고, 9월 영화학교 입학을 위해 일을 그만 둔지 며칠이 흐른 9년 전 8월에 한 여름날, 사토씨에게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오랫동안 생각한 일인데,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고 이 사업을 운영해줄 사람을 찾았는데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고.

당시 내 사랑 은율씨를 막 만나기 시작한 시점이었고(당시 부동산 서비스의 손님이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한번 해보자. 기껏 공부하라고 유학 보내놓았더니 입학을 한 달 남겨놓고 갑자기 무슨 사업을 운영하겠다는 내 결정에 아버지는 화가 나셔서 파리로 날라오셨고, 회사로 찾아오셨다.

당시 사무실 지하실에서 사토씨가 눈물 흘리면서 미안하다고, 아버지께 했던 말, 그리고 그 장면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내가 이 분야에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고 해주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무언가를 “특별하게” 잘한다는 말을 해주신 분이었고, 나는 그것을 믿고 싶었고, 그 믿음을 저버리기 싫어서라도 정말 그렇게 되고 싶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버지는 딱 1년 만 경험해보고 내년에는 무조건 학교에 입학하라며 허락해주셨다.

20대 초반의 실패에 대한 회고

결론적으로는 이 사업을 나는 성공하지 못했었다. 철도청과 우체국의 디지털화로 인한 직원 감소로 파리에 몇몇 직원 기숙사 공실이 생겼던 것이고, 우리는 그에 의존하는 수익 모델이었는데 내가 사업을 맡은 다음해부터 철도청과 우체국이 수익성 악화로 인해 기숙사 건물을 호텔 등으로 바꾸는 리노베이션에 들어갔다.

어떻게든 직원 월급을 줘야했던 내게는 새로운 수익 모델이 필요했다. 2012년 겨울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파리 트로카데로에 2만명을 모으는 것을 보고,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어와 아시아 언어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는 것을 느꼈고 (당시 BTS는 아니었지만 프랑스에도 매니악하긴 했지만 한국 아이돌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던 시기였다), 어차피 다국적 직원이 있고 다국적 고객들을 상대하니 한국어와 일본어 수업을 해보자며, 은율씨가 직접 홍보 브로셔를 디자인해주고, 한 겨울에 직원들과 함께 지하철역전에서 홍보물을 나눠주며 무료 수업을 홍보하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나름 노력했으나, 결국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나는 학생 비자로 가서 공부는 안하고 일을 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았고, 이 소송은 4년간 이어져 프랑스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토씨가 사업자 비자로 바꿔주기로 했으나,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처음 직접 채용했던 인턴도 사정이 악화되며 중간에 계약을 해지할 때 그 죄책감은 너무 컸다. 처음의 장밋빛 기대와는 달리 모든게 만신창이가 되버린채 끝났다.

비즈니스로 빠져 든 내 삶

그 끝에서 내가 얻은 것은, “비즈니스”라는 것을 정말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생겼다. 주먹구구식으로 엑셀로 기록하던 입출금 내역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회계를 배우고, 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진짜 프라이싱 전략도 배워보고 싶었다.

당시 넘치던 열정으로 너무나 혹독하게 달려서 함께 일했던 한 아주머니는 우신 적도 있다. 효율성만 중시하고 드라마틱하게 시스템을 바꾸면서 직원 분들도 이 방식을 배워나가길 바랬는데, 그게 너무 어렵고 힘들다면서… 어떻게 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할까도 정말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듬해 나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어쩔 수 없이(?) 지키며 경영학교에 입학하였고, 그렇게 내 진로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이 경험이, 방황이, 실패가 없었다면 나는 오늘 내가 팀원들과 누리는 이 즐거운 도전을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위도 없고 열정만 있던 나를 온전히 바라봐주고 믿어준 사토씨가 없었다면 결코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온전한 믿음을 준다는 것.

그러한 믿음을 받아본 사람인 나조차, 이제 다시 더 큰 사업을 운영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매일 깨닫는다. 그러나 믿음조차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함께 하는 이의 최선을 기대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라고 늘 믿는다.

올 여름, 특히 당시의 나와 같은 20대 초반 인턴 분들이 많아지면서 새벽에 감상에 잠겼다.

나도 혹시, 누군가에게는,

나의 인생을 바꿔버린 사토상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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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jin /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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